연천에서 보는 임진강과 관련된 역사적명소 호로고루 경순왕릉 ­

경기도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인 연천에도 늦은 봄이 찾아왔습니다.

과거 삼국시대때부터 연천은 임진강을 끼고 있었던 지역이기에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도가 높은 지역이었습니다.

임진강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역사적 흔적을 볼 수 있는 연천의 명소인 호로고루, 그리고 경주를 벗어난 유일한 신라왕릉인 경순왕릉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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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​먼저 임진강 중류에 위치한 고구려군의 요새인 호로고루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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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이곳은 현재 역사적인 명소로도 알려져있지만 성벽을 오르는 계단이 하늘로 가는듯한 모양새를 띄고있어 사람들에게 사진명소로도 알려지고 있는곳입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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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봄이 찾아와 푸르게 빛나고있는 청보리밭 사잇길로 멀리 호로고루의 성벽이 보입니다.

호로고루 아래 비탈길에는 분홍빛깔의 앵초를 심어두어 봄이 다가옴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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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이곳은 강과 천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강안평지성으로 동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20-30m의 현무암 절벽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.

크기가 큰편은 아니지만, 이미 천연의 성벽이 구축된 형태였고, 방어력 보강을 위해 아래 점토퇴적층에도 성벽을 구축했음이 확인되고 있다고하네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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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이 근방에 높은 지형이 있는 곳이 또 없어서 사방을 넓게 조망할 수 있습니다.

하류방향으로는 고랑포 나루터도 조망할 수 있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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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​지금은 호로고루 성벽의 동쪽에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있어 출입이 가능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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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동벽에 드러난 축성방법은 고구려군의 독특한 축성방법이 보여지고 신라보축성벽등에서 보이는 성벽들은 이후에 임진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에서 이 호로고루 성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현무암 다루는 기술이 고구려석공에 비해 모자라 그들이 다뤘던 익숙한 편마암을 멀리서 가져와 성벽을 다시 쌓는 수고를 했다고 합니다.

​​​동벽에 드러난 축성방법은 고구려군의 독특한 축성방법이 보여지고 신라보축성벽등에서 보이는 성벽들은 이후에 임진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에서 이 호로고루 성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현무암 다루는 기술이 고구려석공에 비해 모자라 그들이 다뤘던 익숙한 편마암을 멀리서 가져와 성벽을 다시 쌓는 수고를 했다고 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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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​ 고구려를 신라 백제가 각축전을 벌였던 삼국시대가 끝나고 고려가 건국하였습니다.

건국하는 과정에서 신라는 이미 세가 기울었고 신라 경순왕은 전쟁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 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릎쓰고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이양하였습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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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 이후 고려의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아 고려왕실에 편입되었고, 경순왕은 고려경종 3년에 개성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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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모든 신라의 왕릉은 경주를 벗어난곳에 세워지지 않았기에 이 경순왕또한 경주로 운구하기위해 연천의 고량포에 이르게됩니다.

그 당시 고랑포는 큰배가 운행가능한 임진강 수운의 종착점으로 해당되는곳 물류의 중심지였기때문이었습니다.

하지만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로의 운구행렬로 인해 민심의동요를 걱정했던 고려왕실에서는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는 이유로 고랑포구 근처에 위치한 이곳에 신라 경순왕릉을 세웠다고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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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능이 마련된 후 임진왜란이 지나고 잊혀졌다가, 조선 영조 23년에 기록으로 다시 이곳을 찾게되어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묘소격식으로 재정비되었다고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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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​다른 경주의 왕릉은 왕릉끼리 모여있어 웅장했지만. 이곳 경순왕릉은 왕릉을 제외한 건물이 비각, 재실외에는 공터 뿐이었습니다.

경기도에서 신라의 왕릉이 있었던,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역사가 있었던 장소인 신라 경순왕릉입니다.

당시 연천의 고랑포구가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을 이러한 역사명소로 알 수 있었습니다.

​한국전쟁 이전 에는 이곳 연천 고랑포구에 백화점이 있을정도로 발전했던 곳이었다고 하는데요.​앞으로가 기대되는 연천의 역사적인 명소 경순왕릉과 호로고루였습니다!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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